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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후기 - 격렬비열도 본문
박후기, 실천문학사, 2015
2015. 11. 10 완독
도서관에서 빌리고 싶은 책들을 빼곡히 적어가도 막상 골라 나오는 책들은 그 목록과 꼭 같지는 않은데, 이번에도 그랬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시집들 사이에서 강렬한 색감 때문이었는지, 반가운 이름을 발견해서였는지, 박정대 시인의 시 제목이 생각나서였는지 이 책을 집어 들었고 시 두어 편을 읽고는 바로 대여하기로 결심했다.
시집에 대한 짤막한 감상이라고 한다면, 시인이 나이를 먹는 만큼 시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
처음 박후기 시인의 시집을 접했을 때에는 청춘이나 고독, 사랑과 이별에 관한 주제를 전달하는 '청년의 시'라는 느낌을 받았었다면, 어느덧 한 가정의 가장 혹은 중년의 관점에서 세상을 관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 소시민으로서의 무력감, 사회의 어른으로서 아이들이나 청년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죄스러움, 그런 것들이 느껴졌다.
이 시집은 좁은 의미에서 밥 벌이의 어려움을, 넓은 의미에서 '무정한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기란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소재들도 4. 16 세월호 사고, 취업, 가족, 핵발전소, 성(性), 권력가와 노동자 등으로 다양하다.
아버지는 공중부양(호버링) 같은 가족부양을, 어머니는 복서로서 링에 오르고, 누나는 라운드걸, 오빠는 대기실에서 청춘을 보낸 시간 강사다. 노동자(유권자)들은 권력가(정치인)들의 입맛에 맞게 살아 있지도 저항하지도 못하는 박제가 된다.
이러한 절망의 상황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온전히 시를 쓰는 일이 아닐까.
손처럼 다른 이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동시에, 시라는 꽃병에 목련을 담는 선동가가 되어 투쟁하는 것.
비열한 세상, 하지만 비굴하게 살진 말자고, 희망을 품고 뜨겁게 살자고 말하는 것 같다.
오빠
오빠는 시간 강사,
몰락한 집안의 기둥이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어김없이 도서관에 들러
무거운책을 상대로
가볍게 몸을 풀어주는 오빠는
주먹보다 입이 세다
지방 원정 경기도 마다하지 않는
오빠가 믿을 것은 맷집밖에 없다
맞아도 맞아도 쓰러지지 않는 아들,
맞아도 맞아도 돌아서지 않는 애인,
맞아도 맞아도 도망치지 않는 오빠의
터진 입술이 붉은
꽃망울을 터뜨릴 때,
엄마가 운다
싸움을 기다리는 시간이
막상 싸우는 일보다 더
막막하고 두렵다는 것을
대기실에서 청춘을 보낸
오빠는 알고 있다
늦은 밤,
취한 주먹을 툭툭 허공에 던지며
문을 열고 오빠가 등장한다
시인의 손
정전, 갑자기 불이 꺼지면 당신은 손으로 벽면을 더듬거리며 전원 스위치를 찾는다. 어둠 속에서, 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니,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 오히려 손을 도와주는 일인 것처럼, 당신은 아예 눈을 감기도 한다. 눈을 감으면, 감은 눈 속에서 불이 켜진다.
시를 쓰는 일은, 불 꺼진 가슴속을 더듬어 시의 스위치를 찾아내는 일이다. 일생 동안 언어의 빈 벽을 더듬는 일이다. 시의 스위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에, 시 쓰기란 결국 눈을 감고 심안(心眼)으로 보는 일이다. 망막 속에서 명멸하는 한 줄기 빛을 찾아내는 일이다.
시인의 손은 사물의 형상과 내면을 어루만진다.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시인은 손끝에서 시를 뽑아낸다.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손, 누군가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 술잔을 주고받지만 술은 마시지 못 하는 손, 합심하여 기도하는 손, 사랑하는 이를 끌어안는 손, 그러나 자신을 끌어안지는 못 하는…….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만질 수 있으나, 시가 아닌 그 어느 것 하나 가질 수 없는 시인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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