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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본문
줄리언 반스, 최세희 옮김, 다산책방, 2012
(원제: The sense of an ending)
주인공 토니는 전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가장 친한 친구 에이드리언의 교제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한 답장을 한다.
얼마 후 에이드리언의 자살 소식을 접하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다.
베로니카의 어머니로부터 500파운드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상속받게 된 토니는 일기장을 받기 위해 베로니카에게 연락을 하게 되고, 에이드리언이 자살한 이유와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1부는 40여년 전의 일화를 중심으로 한 토니의 회상으로, 2부는 현재시점에서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주제는 가볍지 않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나도 2번을 읽었다.
처음에는 토니의 입장에서 어두운 벽을 더듬는 기분으로, 두번째는 하나하나 퍼즐을 끼워맞추는 기분으로.
크게 2번의 반전이 나오는데, 토니가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치졸한 저주에 가깝다는 것과 에이드리언의 아이의 엄마가 예상과 달랐다는 것.
아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제목 때문인지 내 추리도 번번이 엇나갔다.
몇 가지 생각해 본 내용은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의 기억은 얼마나 불완전한가, 죄의 연결고리는 어디까지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1부에서는 학창 시절 에이드리언에 대한 몇 가지 일화가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조 헌트 영감의 역사시간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재미있다.
- 토니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후에 헌트 영감은 "역사는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고 첨언한다.)
- 콜린 "역사는 생 양파 샌드위치입니다. 죽자고 반복하니까요."
- 에이드리언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여기서 에이드리언의 대답은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와 맞닿아있다.
'파트리크 라그랑주'라는 가상의 역사학자의 말을 빌어 작가의 역사 인식을 나타낸다.
2. 인간의 기억은 얼마나 불완전한가
관계의 중심에 있었고 심지어 역사학을 전공한 토니는 소설의 화자로 적절해보인다.
하지만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관계에서 그는 패자이기에 '생존본능' 혹은 '자기보존 본능'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억을 왜곡한다. (물론 그는 의식적으로 깨닫지 못하지만)
본인은 쿨하게 둘의 관계를 인정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그들에게 작성한 편지는 저주에 불과했다.
베로니카가 춤을 추지 않았다고 기억했지만, 실제로 그녀는 그와 딱 한번 춤을 춘 적이 있고, 세번 강의 해소도 함께 갔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베로니카의 미스테리한 행동이나 그녀 가족들의 비호의적인 행동이나 인상들도 실제와는 매우 달랐을 수 있고.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어디까지 진실을 추구할 수 있을까'와 관련해서 영화 <메멘토>가 생각났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고 몸에 문신을 새겨 기록하는 행위도 중간에 어떤 의도로 거짓이 될 수밖에 없는 속수무책.
3. 죄의 연결고리는 어디까지인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에 남겨진 인간관계의 축적을 나타낸 공식은 그가 왜 자살을 택했는지를 말해주는 유서와 같다.
에이드리언과 사라 사이에 아기가 생긴 것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어디까지 그 책임의 소재를 물을 수 있을까.
당사자들의 문제로 국한될까, 아니면 토니와 베로니카까지의 연결고리를 확대해야할까.
아마 후자라고 생각한다면 베로니카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을 것이고, 사라는 일기장을 토니에게 남기려고 했던 게 아닐까.
에이드리언의 자살은 그 사슬을 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인지 불분명하지만, 일기 복사본의 끊긴 부분은 아마도 '만약 토니가 그런 편지를 쓰지 않았더라면' 정도겠지.
4. 몇 가지 대비들
- 토니: 평균치 인생. 평균치 진실. 평균치 윤리관.
- 에이드리언: 1등급 성적. 1등급 자살.
그러나 '자살을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생각했던 에이드리언의 자살은 '에로스와 타나토스'감도 아니었던 롭슨의 자살과 동일선상에 있다.
- 마거릿: 매사에 분명한 여자
- 베로니카: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여자
실제로 어느 한 면만 가진 사람이 있을지. 결과적으로 토니는 둘 모두와 온전한 관계를 지속하지 못한다.
('토니, 당신은 이제 혼자야'라는 마거릿의 목소리. 그리고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라는 베로니카의 목소리.)
+ 덧붙여,
역사가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정의한다면,
거기에 '부적절한 의도'가 만나서 역사 교과서가 만들어졌을 때의 결과는 얼마나 무서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책에서 마음에 남았던 구절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중략)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시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닭장 같은 데 갇혀있는 신세라고 생각했고, 그곳을 벗어나 우리의 인생으로 풀려날 날을 기다렸다. 그 순간이 오면, 우리 인생 - 과 시간 자체 - 의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상황을 막론하고 이미 시작돼버렸음을, 그래서 이미 얼마간 득을 봤고, 또 얼마간 손해를 감수했음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그런데다 우리가 닭장에서 풀려난다 한들, 처음엔 그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는 더 큰 다른 닭장으로 결국 들어가게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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